1. 오전 11시, 에스프레소와 맥주
하루동안 아주 작은 어느 카페의 창가 테이블 한 자리에서 네 인연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나는 마치 카페의 바 안쪽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오전 11시, 테이블에는 에스프레소와 맥주가 놓였습니다. 유진과 창석은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인데, 유진이 그동안 스타배우가 되었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더라도 창석은 유진을 방송이나 영화에서 봐왔을 것입니다. 아쉽게 이별한 사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 만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설레는 표정이 기분 좋아 보였지만 창석은 유진에게 직접 듣는 이야기보다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단지 그 소문을 유진에게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 보이는 그저 그런 남자였습니다. 유진의 알 수 없는 표정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는 듯합니다. 게다가 배우가 된 옛 애인을 만나러 간다고 회사에 다 소문을 낸 건지 밖에는 창석의 직장 동료들이 훔쳐보고 있습니다. 아, 역시 옛 연인은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나 많이 변했어"라고 말하는 유진은 자신의 사회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단단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오후 2시 30분, 커피 두잔과 초콜릿 무스 케이크
나른하고 여유로운 오후, 또다른 남녀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습니다.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연인관계는 아닌 듯하나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은 몇 달 만에 두 번째로 만났고 몇 달 전 처음 만난 날은 함께 하룻밤을 보낸 사이였습니다. 단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난 뒤 남자 민호는 훌쩍 세계여행을 떠났고 이제 막 돌아와 경진을 만나는 중입니다. 세계여행이 핑계일지 그저 하룻밤 즐긴 것일 뿐이었을지 경진에게는 궁금함과 불안함이 있었고 화도 났습니다. 그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하는 경진을 히죽히죽 웃어가며 실없이 받아줄 뿐입니다. "좋은 거 보면 사진이라도 하나 보내줄 줄 알았어요"라고 경진은 용기 내서 말합니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훌쩍 떠난 너를 나는 잊지 않고 많이 기다렸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경진의 용기 있는 말에도 민호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결국 경진이 일어섭니다. 민호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제야 경진을 붙잡은 민호는 가방에서 여행 중 경진을 위해 산 온갖 선물들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습니다. 이내 서로 같은 마음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고, 민호가 파스타를 해주겠다며 먹고 가라는 말에 카페를 나섭니다. 시작하는 연인의 모습은 테이블에 놓은 진한 초콜릿 케이크처럼 달콤합니다.
3. 오후 5시, 따뜻한 카페라떼 두 잔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은 창가 테이블에 이번에는 모녀로 보이는 나이차이의 두 여성이 앉아있습니다. 엄마처럼 보이는 숙자와 딸처럼 보이는 은희, 사실 이 두 사람은 모녀는 아니고 은희의 결혼 과정에서 모녀 연기를 하기로 계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두 사람은 철저한 타인이므로 숙자가 상견례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과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면서 감정이 전혀 없는 대화를 시작합니다. 엄마 역할을 맡은 숙자는 수첩에 꼼꼼하게 받아 적다가 은희의 결혼식 날짜가 몇 해 전 죽은 자신의 딸의 결혼식 날짜가 같다는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랍니다. 그제야 은희는 본인의 어머니도 이미 돌아가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계약이 필요할 정도로 은희가 경제력이 있는 남자를 물었다고 생각했던 숙자는 대화가 진행될수록 남자의 조건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결혼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은희는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좋아서 하는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은희는 자신이 계속 거짓된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의 결혼식에 진짜 부모와 친구들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숙자는 은희에게 연민을 느낀 것 같습니다. 다른 시간대의 인연들과 달리 거짓으로 맺어진 이 두 사람은 이렇듯 대화를 하면서 차츰 서로에게 진심이 되고, 믿게 되는 만남의 목적과 상반되는 관계로 발전이 되는 듯합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은 아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숙자는 오늘 처음 만난 은희의 결혼을 진심으로 응원해 줍니다.
4. 저녁 9시, 남겨진 홍차와 식어버린 커피
이제 마지막 손님입니다. 비가 오는 저녁 9시, 먼저 와서 혜경을 기다리던 운철이 테이블에 있던 꽃의 꽃잎을 찢어놓은 것을 보고 막 도착한 혜경이 한소리를 하자 운철은 말합니다. "그냥 꽃인데 뭐, 어차피 죽은 꽃이야" 둘의 결말을 암시하려던 감독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느끼기에 두 사람은 오랜 연인관계로 보였지만, 그저 끝나버린 관계에 대한 질척함이 주를 이루는 옛 연인일 뿐입니다. 감정과 이성에서 이성 즉, 현실을 선택한 혜경은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결혼 전까지 만남을 지속할 것을 제안하고 운철은 남은 미련에 흔들리지만 그럴 만큼 용기는 나지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운철도 혜경을 잊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혜경은 오히려 쿨하게 돌아섭니다. 사랑도 용기도 결국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부적절한 만남을 지속하길 바란 것도 아니고 어떤 현실적 이유로 헤어지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사랑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두 사람의 결말이 안타까웠습니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다른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던 혜경이 많이 아프지 않길 바랍니다.
영화 '더 테이블'은 마치 어느 날 혼자 카페에서 쉬고 있는데 테이블이 가깝고 카페가 조용한 탓에 옆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엿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려 알게 되는 여러 가지 이야기 같았습니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연기가 정말 좋았고, 김종관감독의 독특하고도 자연스러운 연출이 돋보였으며 영상미가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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